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공부를 곧잘 하던 아이가 갑자기 공부에 흥미를 잃고 수업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십중팔구 자녀가 노력을 하지 않는다며 다그칠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학습부진이 아닐 수도 있다. 부모에게 필요한 내 아이 상담법, 여섯 번째 편으로 ‘느린학습자’를 준비했다.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는 못하지만 자신만의 속도로 길을 가는 아이들이 있다. ‘느린학습자’다. 느린학습자란 ‘경계선지능’을 지닌 아이들을 말한다.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 경계선지능은 평균 지능(IQ 85~115)에는 못 미치지만 지적장애(IQ 70 이하)는 아닌 경계구간을 의미한다. IQ 71~84 사이다. 경계선지능을 지닌 아이들은 대략 13%에 달한다. 초등학교 한 반에 3명은 경계선지능인인 셈이다.
하지만 자녀가 경계선지능인지를 깨치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 학령기에 접어들어 학습부진을 겪다 지능평가를 받으면서 드러나는 경우가 많아서다.[※참고: 일반적인 학습부진은 보통 수준의 지능이면서 학업성취도가 낮은 경우를 말한다. 경계선지능으로 인한 학습부진과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경계선지능은 지적장애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당연히 경계선지능을 지닌 아이들은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다닌다. 문제는 이 아이들이 일반학교의 빠른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는 점이다. 더욱이 일반학교엔 경계선지능인을 위해 특화한 교육이나 지원이 전무하다.
이 때문에 경계선지능인을 자녀로 둔 부모들은 다음과 같은 감정을 토로하곤 한다. “…차라리 지능검사 결과가 더 낮게 나와 지적장애 판정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특수교육도 받고 여러 지원도 받을 수 있지 않겠나….” 경계선지능인의 어려움은 고학년이 될수록 더 커진다. 또래 간 경쟁이 심화하고 학업 스트레스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높은 수준의 사고력을 요구하는 학습이 이뤄지다 보니 경계선지능인은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점은 언급한 것처럼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가 경계선지능인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 경계선지능을 지닌 아이가 있다. 학업엔 흥미가 없고, 매일 게임에만 몰두한다. ‘수업시간엔 엎드려 잠만 잔다’는 선생님의 이야기도 들려온다.
부모로선 자녀가 게임에 몰두하는 게 경계선지능의 영향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저 자녀가 ‘게임중독’인 것만 같다. 그래서 부모의 관심은 온통 ‘자녀의 게임을 금지하는 데’ 쏠린다. 하지만 이 아이는 경계선지능에 해당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점점 어려워지는 학업을 따라가기 힘들고, 또래 관계나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으니 게임세계에 빠졌던 거다.
이처럼 경계선지능을 알아차리는 건 쉽지 않다. 경계선지능인이더라도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우수한 학업성적을 내는 경우도 숱하다. 당연히 부모로선 고학년이 된 후 떨어진 성적을 이해하기 어렵다. 자녀의 ‘노력 부족’이나 ‘집중력 저하’ 등에서만 문제를 찾곤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자녀를 ‘학습클리닉’에 보내거나 집중력 향상을 위한 약을 복용하게 하는 이들도 있다. 필자가 만난 한 부모는 “어떨 땐 ‘우리 아이가 정말 지능이 부족한가’ 싶을 정도로 말도 잘하고, 생각도 깊다”면서 “공부에 흥미를 잃어서 그렇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텐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위험하다. 자칫 자녀와의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이 될 수 있어서다. 더욱이 경계선지능인들은 학습부진뿐만 아니라 대인 관계, 사회적응, 정서적 안정 등에 어려움을 겪는다. 관련 전문가들은 “경계선지능인의 경우 충동적이고, 주의력이 부족하고, 자존감이 낮은 경우가 많다”고 입을 모은다.
이 때문에 장기간 이어지는 학업 성취도 저하는 경계선지능인 스스로에게 큰 스트레스를 준다. 열등감이 높아지고 자존감이 낮아지는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부모가 자녀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경계선지능인을 둔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는 가장 필요한 건 ‘이해’와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경계선지능 탓에 가장 큰 상처를 입는 건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할 때면 오래전 만났던 내담자가 떠오른다. 그는 대학교 복학을 앞두고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불안해 상담을 신청했다.
심리평가 등을 해본 결과, 그는 경계선지능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 때문인지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었고, 충동적인 성향도 높았다. 문제는 내담자가 자신이 경계선지능인지 모른 채 평생을 살아왔다는 점이다. 그는 이렇게 털어놨다. “살면서 대인관계나 학업에 늘 어려움이 따랐어요. 그래도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살았죠. 하지만 모든 게 쉽지 않더라고요. 아르바이트도 수차례 도전했지만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어요. 스트레스가 쌓여 한달을 넘기지 못했죠.”
자신이 경계선지능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부단히 노력했을 내담자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경계선지능인에게 가족뿐만 아니라 사회의 적절한 도움이 필요한 이유다. 그동안 경계선지능인을 지원할 제도를 소홀하게 다뤄온 건 사실이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올해부터 서울시 청소년상담복지센터가 ‘느린학습자 지원체계 구축 시범사업’을 진행하게 됐다는 점이다. 시민참여예산으로 이뤄지는 사업이어서 더욱 뜻깊다. 필자는 이 사업에 거는 기대가 크다. 느린학습자라는 명칭에서도 나타나지 않는가.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경계선지능인이 ‘조금 느린 것뿐’이라는 점이다. 그들도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이 이뤄진다면 건강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
유혜진 서울시청소년상담복지센터 소장 | 더스쿠프